1. 시조지(始祖誌 : 시조에 관한 기록)

馬氏의 시조(始祖)는 마완(馬浣)이시다. 은(殷)나라 양성인(陽城人)으로 학식과 덕행이 높은 군자(君子)이다. 은(殷)나라 말기에 마완(馬浣)⋅마장(馬莊) 부자(父子)는 주왕(紂王)의 폭정(暴政)에 인(因)한 어지러운 세상을 피하여 경서(經書)를 가지고 은거(隱居)하다가 은(殷)나라가 멸망(滅亡)한 뒤에 마장(馬莊)이 기자(箕子)와 더불어 조선에 처음으로 동래(東來)하셨다고 한다. 인(因)하여 우리 馬氏는 동래조(東來祖) 마장(馬莊)으로부터 비롯하였으나, 옛 법도(法度)에 따라 동래조(東來祖) 마장(馬莊)의 부(父) 마완(馬浣)을 시조로 모시고 있다.

 

통칭(通稱) 은(殷)나라를 중국(中國)의 고대왕조(古代王朝)라고 하나 근래(1928~1936) 은허(殷墟 : 殷나라의 옛터)가 발굴되면서 당시의 은족(殷族)은 전형적인 동방조선족(東邦朝鮮族) 계열의 동이족(東夷族)이라는 것이 현대의 중국학자들의 통설(通說)이 되고 있다.(중국학자(中國學者)⋅서양지(徐亮之)⋅임혜상(林惠祥))

 

따라서 우리 馬氏는 고조선(古朝鮮)에 뿌리를 둔 가장 전통적인 고성(古姓)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은족(殷族)의 계보(系譜)에 대하여는 삼가 후일의 더 정확한 고증을 기다리기로 한다.(중국사기(中國史記)⋅한서(漢書)⋅기자본전(箕子本傳))

 

2. 본관지(本貫誌 : 본관에 관한 기록)

漢城帝鴻嘉三年百濟左輔馬黎與烏干全聶等十人從溫祚王南行開國以十濟元勳受封於馬斯良縣世食其邑後孫入鄕及高麗改馬斯良爲會寧仍貫會寧我 太宗朝會寧屬長興遂貫長興

해설 : 서기원전(西紀元前) 18년에 마려(馬黎)⋅오간(烏干)⋅전섭(全攝) 등 10인이 온조(溫祚)를 잘 도와서 인도하여 졸본부여(卒本扶餘)를 피하여 남쪽으로 내려와 위례성(경기도 남한산)에 도읍(都邑)하여 십제(十濟)를 건국하고 온조(溫祚)를 왕(王)으로 받드니 온조왕이 개국원훈(開國元勳) 마려(馬黎)에게 좌보(左輔 : 대신)의 벼슬을 내리시고 마사량현(馬斯良縣)을 식읍(食邑)으로 내리니 후손이 세거(世居)하여 대대로 이어 받았다.

 

마사량현(馬斯良縣)은 고려초(高麗初)에 회령(會寧)으로 고쳐 불렀는바 이로 인하여 본관(本貫)을 회령으로 하다가 고려 인종(仁宗) 때에는 회령이 장흥(長興)에 속하게 되니 다시 본관을 장흥(長興)으로 하였다.

 

(1) 상고문헌(詳考文獻 : 자세히 검토할 전거자료)

① 백제본기(百濟本紀 : 삼국사기 중의 제23권, 백제본기 제1편)

百濟始祖溫祚王其父鄒牟或云朱蒙自北扶餘逃難至卒本扶餘扶餘王無子只有三女子見朱蒙知非常人以弟二女妻之未幾扶餘王薨朱蒙嗣位生二子長曰沸流次曰溫祚(或云朱蒙到卒本娶越郡女生二子)及朱蒙在北扶餘所生子來爲太子沸流溫祚恐爲太子所不容遂與烏干馬黎等十臣南行百姓從之者多遂至漢山登負兒嶽望可居之地沸流欲居海濱十臣諫曰惟此河南之地北帶漢水東據高岳南望沃澤西阻大海其天險地利難得之勢作都於斯不亦宜乎沸流不聽分其民歸彌鄒忽以居之溫祚都河南慰禮城以十臣爲輔翼國號十濟是前漢 成帝鴻嘉三年也沸流以彌鄒忽土濕水鹹不得安居歸見慰禮都邑鼎定人民安泰遂慙悔而死其臣民皆歸於慰後以來時百姓樂從改號百濟

해설 : 백제를 건국한 시조는 온조왕(溫祚王)으로 그 부친은 주몽(朱蒙)이라고 한다. 주몽이 북부여로부터 피난하여 졸본부여에 이르렀는데 졸본부여왕은 아들이 없이 딸 셋만 있어 근심하던 중 주몽을 만나보고 비범한 사람임을 알아차리고 둘째사위로 삼았다. 그 뒤 얼마 아니하여 졸본부여왕이 죽으므로 주몽이 왕위를 잇고 두 아들을 낳으니 장자가 비류(沸流)이고 둘째는 온조(溫祚)다. 그런데 주몽이 북부여에서 낳은 아들 유리(琉璃)로 태자(太子)를 삼으니 비류와 온조는 태자(太子)가 못된 두려움에 마려(馬黎)⋅오간(烏干) 등 10신(臣)과 더불어 남쪽으로 피해 오니 따르는 자가 많았다. 그들은 한산(漢山)에 이르러 높은 곳에 올라 살만한 곳을 찾는데 비류는 해변으로 가서 살고자 하므로 10신(臣)이 말하기를 이곳 하남(河南)땅은 한수를 끼고 동으로 높은 산이 있고 남으로는 기름진 옥토가 있으며 서쪽은 큰 바다가 가로 막았으니 이 자연적인 형세는 얻기 어려운 곳이라 하여 여기에 도읍할 것을 권고하였으나 비류는 듣지 아니하고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인천)로 가고 온조는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하여 10신(臣)과 더불어 10제국(濟國)을 세웠다. 이때가 서기원전 18년이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짜서 편히 살 수가 없으므로 위례성에 와보니 도읍을 정하고 백성이 편하게 살고 있으므로 드디어 참회하고 별세(別世)하니 그 백성이 모두 위례성으로 모여 살았다. 그 뒤로 백성들이 즐겁게 따르므로 나라이름을 백제라 고쳤다.

 

② 회령연혁지(會寧沿革誌 : 회령현이 변천하여 온 내역)

本百濟馬斯良縣新羅景德王改爲代勞爲寶城郡領縣高麗改令名仍屬我太宗朝來屬長興

해설 : 본래 백제의 마사량현(馬斯良縣)을 신라 경덕왕이 대로현(代勞縣)으로 고쳐 보성(寶城)의 영현(領縣)으로 하다가 고려 때에 회령(會寧)으로 고쳤고 이조(李朝) 태종조(太宗朝)에 장흥(長興)에 속(屬)하게 되었다.

 

③ 장흥연혁지(長興沿革誌 : 장흥이 변천하여 온 내역)

百濟烏次縣新羅烏兒高麗定安仁宗朝改長興元宗朝改懷州忠宣朝復爲長興我 太宗元年從之中寧太宗十三年又徙遂寧古墟爲都護府別號冠山按輿地圖姓氏以馬氏系之會寧馬氏舊乘亦以會寧爲貫矣會寧今屬長興而是爲受封之鄕故仍爲長興馬氏又按舊乘戶長公以上三代墓云在遂寧白南山(卽今治所右崗世傳馬政丞墓所)戶長公之孫(平章事諱壽孫)退居山下之汭陽江號東江隱士東江公之曾孫忠靖公生于會寧鳳林山下茅原村(卽今治東五十里)眞泉上中歲移居于谷城梧枝面堂山村次子釣隱公景泰丙子退居汭江仍號釣隱由是推之兩寧彊界相連戶長公上下累代自會而遂東江公以後自遂而會釣隱公復居于遂寧無疑矣

해설 : 백제 때 오차현(烏次縣)⋅신라 때 오아현(烏兒縣)⋅고려 초의 정안현(定安縣)을 인종조(仁宗朝)에 장흥(長興)으로 고쳤다가 원종조(元宗朝)에 회주(懷州)로 다시 고치고 충선조(忠宣朝)에 다시 장흥(長興)으로 하다가 조선조 태종원년(太宗元年)에 치소(治所)를 중령(中寧)에 옮기고 13년에 다시 수령(遂寧) 옛터에 옮기니 별호(別號)를 관산(冠山)이라고도 한다.

동국여지승람을 살펴보니 성씨에 회령마씨(會寧馬氏)가 있으며 구 족보도 회령으로 본을 삼았다가 그 후 회령이 장흥으로 개칭됨으로 장흥을 본관으로 하였다.

또 구 족보를 보니 호장공(戶長公 : 휘 작룡(諱作龍)) 이상 3世의 묘가 수령백남산(遂寧白南山)에 있다고 전하며(장흥읍 오른쪽 산등성이에 마정승(馬政丞) 묘소가 있었다고 전함) 호장공의 손자 동강공(東江公 : 휘 수손(諱壽孫))이 평장사 벼슬에서 물러나 예양강 위에 사시니 호(號)를 동강은사(東江隱士)라 하고 公의 증손 충정공(휘 천목(諱天牧))이 회령의 봉림산 밑 모원촌에서 태어났으나 어렸을 때 곡성군 오지면 당산촌(현곡성읍)에 이사하고 충정공의 둘째아들 조은공(휘 전(諱腆))은 병자(丙子) 1456년에 내양강 위에 사시니 호(號)를 조은(釣隱)이라 하시다.

미루어 보건대 회령(會寧)과 수령(遂寧)이 서로 접경(接境)으로 호장공 상하(上下) 여러 代가 회령과 수령에 살고 조은공이 다시 수령에 살았다 함은 의심이 없다.

 

도선산도(都先山圖)

전라남도 장흥군 용산면 용두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