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조 마장(東來祖 馬莊) : 은나라 양성으로부터 고조선에 처음 오신 조상

公은 경서(經書)에 정통한 학자(學者)다. 은(殷)나라 말기에 주왕(紂王)의 폭정(暴政)을 피하여 경서를 품고 종적을 감춘 바 있는 公은 복희씨(伏羲氏)의 팔괘(八卦)와 경서의 아홉가지 정치도덕의 원칙(홍범구주(洪範九疇))에 밝은 학자로서 주무왕(周武王) 13년 기자(箕子)와 더불어 조선에 동래(東來)하여 새로운 분야를 발전시키고 심오한 섭리와 지극한 정성으로 잘 다스려 인성(人性)이 덕(德)스럽고 선(善)하게 기르고 문물제도(文物制度)와 인륜(人倫)의 질서(秩序)를 세우고 팔조금법(八條禁法)을 힘써 가르치고 옛날의 전답제도(정전법(井田法))를 은나라 제도에 따라 시행하였다.(기자본전에 근거함)

 

 

관조 백제좌보 마려(貫祖 百濟左輔 馬黎) : 성씨의 본관을 장흥으로 하게 한 조상

백제 온조왕 때 좌보(左輔 : 大臣)다. 서기원전(西紀元前) 18년 마려(馬黎) 오간(烏干) 전섭(全攝) 등 10인이 온조를 잘 도와 인도하고 병사(兵使)를 다스려 졸본부여(卒本扶餘)를 피하여 南으로 내려와 위례성(慰禮城)에 도읍(都邑)하여 십제(十濟 : 백제)를 개국하니 그 공훈으로 마사량현(馬斯良縣)을 식읍(食邑)으로 봉(封)하다. 마사량현(馬斯良縣)은 그 뒤에 장흥(長興)에 영속(領屬)되었으므로 이로 인하여 본관을 장흥으로 하였으므로 후손이 관조(貫祖)로 모시고 있다.(백제기에 근거함)

 

 

1세조 중시조 판개성윤 마혁인(中始祖 判開城尹 馬赫仁) : 쇠퇴한 가문을 다시 일어나게 한 조상

고려 선종(宣宗) 때(1085년) 문과(文科 : 옛 문관을 뽑는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특진(特進 : 정2품)에 이르고 판개성윤(判開城尹 : 수도시장)을 지냄으로써 가문에 중흥(中興)의 전기(転機)를 마련하여 벼슬이 대대로 이어지게 하였으므로 公을 1世祖(中始祖)로 모시며 이때부터 가첩이 기록되어 전해 오고 있다.

 

 

2세조 휘 엽(諱 曄)께서는 고려조(高麗朝)에 문과에 급제(文科及第)하여 병부시랑(兵部侍郞)을 지내셨다

 

 

3세조 휘 의유(諱 義裕)께서는 문과에 급제(文科 及第)하여 홍주목사(洪州牧使)를 歷任하셨다

 

 

4세조 명신 문하시중 마희원(名臣 門下侍中 馬希援) : 고려 때 이름난 대신

고려 명종(明宗) 때(1190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벼슬이 개부의동삼사(開府議同三司 : 종1품) 문하시중(大臣)에 이르다. 계미(癸未) 1223년에 몽고사신 탑고야(嗒古也) 등이 와서 거년의 접대사에 불만을 품고 거리에서 만나는 장사치의 수달피, 명주 등을 번번이 빼앗을 뿐만 아니라 불응한 사람은 사살하는 등 야만적 행패가 심하던 차에 공이 글로써 달래어 뉘우치고 복종하게 하였다 한다. 왕이 공의 권위와 신망이 현저함에 감탄하여 다음 해 몽고사신 찰고야(札古也)가 돌아갈 때에는 왕명에 따라 공이 서경(평양)가지 호송하여 탈이 없도록 하였다고 한다.

 

(1) 유문 문의공휘희원효몽고사모살가인첩(遺文 文毅公諱希援曉蒙古使母殺賈人牒)

     ▶ 상인들을 무턱대고 죽인 몽고사신을 타일러 깨닫게 한 글

 

     君子令名之難而無無賄之難賈人之物非官府之守則固無與於國贐之多少而况國贐禮物歲有常制者乎 按高麗高宗癸未蒙使嗒古也等來以去年國贐不滿其意道遇賈人之持獺皮紬布者則輒奪之不與者彎弓射殺公時爲門下侍中移牒曉之蒙使慚服翌年後使者札古也等歸王以公威信素著於蒙人命公送至西京(事載麗史及家乘)

     군자(君子)라는 명예를 얻으려면 학식과 덕행을 높이 쌓아야 하기 때문에 어렵다고 하는 것이다. 상인의 상품에 대하여는 관에서 간섭하는 법이 아니고 또 사신의 노자(國贐)는 관계에 따르고 있는바 국신예물의 다소를 논하는 것은 군자가 취할 바가 아니다.

     살피건대 고려 고종 계미(癸未)(1223년)년에 몽고사신 탑고야(嗒古也) 등이 와서 거년 국신에 불만을 품고 거리에서 만나는 상인의 수달피와 명주 등 상품을 강탈하고 주지 않는 자는 사살하는 등 행패가 심한지라 당시 문하시중(나라의 모든 정사를 도맡아 보살피는 大臣)인 공이 문서(글)로써 깨우치니 뉘우치고 부끄러워하더라.

     그 다음해 사신 찰고야(札古也) 등은 트집 없이 임무를 마치고 돌아가게 되니 왕이 말씀하시기를 公의 권위와 신망이 몽고사람들을 깨우치게 하였다고 칭찬하고 돌아가는 몽고사신을 서경(西京 : 평양)까지 호송하라고 명하시다.

 

 

5세조 시 문강공(諡 文剛公) 휘 중기(諱 仲奇)께서는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내셨다

 

 

6세조 휘 작룡(諱 作龍)께서는 회령현(會寧縣) 호장(戶長)을 歷任하시고

 

 

7세조 휘 지백(諱 知伯)께서는 호부상서(戶部尙書)를 歷任하셨다

 

 

8세조 휘 수손(諱 壽孫)께서는 예빈정(禮賓正)을 지내시고

 

 

9세조 휘 치원(諱 致遠)께서는 종부령(宗簿令)숭정대부(崇政大夫)로 관산군(冠山君)에 봉(封)하셨다

 

 

10세조 휘 영(諱 榮)께서는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 회령군(會寧君)에 증직(贈職)되셨다

 

 

11세조 시 충정공(諡 忠靖公) 휘 천목(諱 天牧)께서는 朝鮮朝(1399)(定宗)元年에 (正三品) 절충장군(折衝將軍)상장군(上將軍) 정종(定宗) 2年(1400)年에 太宗(芳遠)을 도와 王子의 亂을 平定하여 太宗元年(1401)年에 좌명 공신 (佐命功臣)에 추대(推戴)되시고 (正二品) 동지총제(同知摠制)에 부임(赴任)하셨다

(1402)年 회령군(會寧君)에 봉(封)하시고 (1404)年에 개국.정사.좌명공신 회맹(會盟)에 참여하고 (1406)年에 행 영변대도호부사 行 (寧邊大都護府事)를 歷任하셨다

(1412)年 전라 병마도절제사(全羅 兵馬都節制使) 겸(兼) 판 나주목사 (判 羅州牧使)로 부임(赴任)하셨고

(1413)年 (正二品)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진(昇進)하셨다

(1414)年 君號인 會寧君이 읍호(邑號)를 회령(會寧)에서 장흥(長興)으로 개칭(改稱)됨으로 장흥군(長興君)으로 군호(君號)가 개칭(改稱)되시고

(1416)年 도총관(都摠官)으로 전라 병마도절제사(全羅 兵馬都節制使) 재임(再任)되셨다

(1417)年 전라 병마도절제사(전라 兵馬都節制使)로 재임 시(再任 時) 현광주(現光州)에 있는 전라병영(全羅兵營)을 강진병영(康津兵營) 수인산(受仁山)  아래 옮겨 축성(築城)한 성(城)이 병영성(兵營城)으로 국가사적(國家史蹟)1397號로 現在 復元中이다

(1420)年 (正二品) 정헌대부(政憲大夫)병조판서(兵曹判書)를 歷任하신 후

(1423)年 판 우군부사(判 右軍府使)에 전임(轉任)되셨다

(1428)年 집현전대제학 (集賢殿大提學) 겸(兼) 삼군부사(三軍府使)를 지내시고

(1429)年 (正一品) 보국 숭록대부 장흥부원군(輔國 崇祿大夫 長興府院君) 영돈령부사(領敦寧府使) 겸(兼)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지내셨다

(1431)年  正月二十五日 享年 七十四歲로 別世하시니 세종대왕(世宗大王)께서 부음(訃音)을 듣고 슬퍼하시며 예조(禮曹)에 명(命)하여 장례(葬禮)를 예장(禮葬) 현 국장(現 國葬)으로 법도(法度)에 따라 정성(精誠)껏 뫼시게 하고 대광보국 숭록대부(大匡輔國 崇祿大夫)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 겸(兼) 영경연(領經筵)에 추증(追贈)되셨다

시호(諡號)를 충정(忠靖)이라 내리고 풍수(風水)에 命하여 좋은 묏자리를 잡게 하니 곡성 통명산(谷城 通明山) 방주동 계좌(芳州洞 癸坐)에 예장(禮葬)으로 뫼시니 사방 십리의 땅 사패지지(賜牌之地)를 하사(下賜) 하여  봉사(奉祀)케 하고 부조지전(不조之典)을 내리시니 곡성군  석곡면 방송리  상곡(上谷)에 묘우(廟宇) 충정묘(忠靖廟)를 창건(創建)하여 별세후(別世後) 每年 陰 正月 二十四日 밤 종문(宗門)에서 부조묘제 (不조廟祭)를 봉행 (奉行)하며 시제(時祭)는 음 10월 9일 奉行한다

以外 公의 사우 (祠宇)는 의성崇節祠. 장흥忠顯祠. 강진忠靖祠. 청원 忠靖祠에 影幀을 뫼시고 每年節氣 따라 配享하고있다

忠靖公의 功勳이 건원능(健元陵)현 동구릉 (現 東九陵)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 비(碑)에 陰記되고  헌릉(獻陵) 태종 이방원(太宗 李芳遠) 비(碑)에도 陰記되어있다

 

 

12세조 시 문간공(諡 文簡公) 휘 승 (諱 勝)께서는 조선 태종조(朝鮮 太宗朝) (1415)年 (從四品) 조봉대부(朝奉大夫) 춘추관편수관(春秋館 編修官)을 歷任하시고

(1417)年   태종17 개국.정사.좌명.공신의 적장자(嫡長子)회맹(會盟)에 참여(參與)하셨다

(1420)年   (正四品) 봉정대부(奉正大夫) 호군(護軍)에 오르시고

(1423)年   (從三品) 중훈대부(中訓大夫) 대호군(大護軍)을 歷任하시고

(1426)年   (正三品) 통훈대부(通訓大夫) 상호군(上護軍)으로 오르신 후

(1434)年   (正三品) 통정대부(通政大夫) 행 상호군 (行 上護軍)에 歷任하셨다

(1452)年   (從二品) 개성 유후사유수(開城 留後司 留守)를 지내시고

(1454)年   (從二品) 가정대부(嘉政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 경주 부윤(慶州府尹)에 赴任하셨다

(1455)年   (正二品) 자헌대부(資憲大夫)행 경주부윤(行 慶州府尹)에 재임(再任)되시고

(1457)年   (從一品) 숭정대부(崇政大夫)로 長興君에 봉(封)하셨다

               公이 관직(官職)에 계실 때는 청백리(靑白吏)라 불리셨다

(1463)年   享年 七十一歲로 別世하시니 시호(諡號)를 문간(文簡)이라 내리셨다

公의 幽宅은 곡성군 석곡면 방송리(통명산) 아버지 國葬墓 下에 뫼시고 神主를 경북 의성군 단촌면 하화리 숭절사(崇節祠) 화산서원 (禾山書院)에 봉안(奉安)하고 每年 陰 三月 初 丁日에 아버지 충정공과 같이 儒林에서 奉祀하고 시제(時祭) 每年 陰 10月九日 谷城에서 奉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