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작성자 마뿌리
작성일 2008-10-31 (금) 02:52
분 류 특별
ㆍ추천: 0  ㆍ조회: 2301      
IP: 211.xxx.143
조선왕조 수성공신 마천목(1358~1431)(류창규 교수)
조선왕조 수성공신守成功臣, 마천목馬天牧(1358~1431)

마천목은 장흥의 속현이었던 회녕 출신으로 장흥을 본관으로 하고 있는데, 고려말 조선초 사회적 변혁기에서 주목되는 인물이다. 그가 태어난 시기는 공민왕 7년(1358)으로 정치적인 변화의 물결이 거센 무렵이었다. 마천목의 선대에 대하여는 할아버지 마치원馬致遠과 아버지 마영馬榮이 장흥에서 활동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구체적인 행적은 정확하지 않다. 마천목의 선조는 장흥 회녕현의 토성으로 오랜 동안 회녕에 거주하였던 토착 가계였다. 마천목은 아버지를 따라 곡성으로 옮겨 거주하였는데, 언제 어떻게 곡성으로 왔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어머니가 평산신씨였던 것으로 보아 곡성 지역과 연관이 있으며 그로 인해 곡성으로 이주한 것으로 추측된다.
마천목은 23세 때인 우왕 7년(1381)에 산원散員이라는 정8품 무반직을 받았던 것으로 보아 곡성에 거주하다가 군인으로 관직에 진출하였다고 하겠다. 그가 어떻게 관직에 오를 수 있었는지는 기록이 없지만, 무예가 뛰어나 군인으로 발탁되었던 것 같다. 마천목은 무관으로서 활동하면서 정지鄭地를 따랐다고 한다. 정지는 고려말 특히 공민왕 후반부터 우왕, 창왕대에 걸쳐 활동하였던 무인으로서 전라도 나주 출신이었음으로 마천목이 군인으로 활동하고 관직 생활을 하는데 도움을 주었을 것 같다. 특히 정지는 공민왕대 말기에서 우왕대초에 걸쳐 전라도에서 군사를 지휘하여 왜구를 물리치는데 혁혁한 공로를 세운다. 마천목이 군인으로 발탁되고 무관으로 진출하는 데에는 정지의 역할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고, 마천목이 정지를 따랐던 것도 그러한 관계에서 빚어졌을 수 있다. 그렇지만 그는 정안군 이방원(태종)에게 발탁되기까지 하위 무관으로서 오랫동안 지내야만 했다.
마천목이 중앙에서 급성장하게 된 계기는 1398년(태조 7)의 1차 왕자난이 일어나면서이다. 그는 1차 왕자난 때 이방원의 휘하에서 활동하였으며, 사직司直의 관직에 있었다. 그의 나이 40세에 이르렀으니 10 여 년 이상을 하위 무관으로 머물러 있었다가 조선 건국 이후 이방원에게 발탁되면서 관직도 승진한 것 같다. 마천목이 이방원의 휘하에 속하게 된 것은 조선 건국 이후 이방원이 전라도의 시위군에 대하여 장악하고 있었을 때였을 것이다. 조선 건국 이후 태조 이성계는 왕자들에게 각 지방의 시위군을 관장하도록 하였는데, 이방원은 전라도 시위군을 관장하게 되었다. 이방원은 마천목에게 군사적인 일을 맡겼으며, 마천목은 이방원에게 대의를 다하여 맡은 임무를 완수하였다. 이러한 믿음이 1차 왕자난 때 이방원이 마천목으로 하여금 거사와 관련된 군사적인 주요 임무를 맡기게 된 계기가 되었다.
마천목은 1차 왕자난 때 이방원의 명령으로 이방번을 부르러 갔으며, 중앙군의 핵심 지휘관이었던 이천우가 정안군 이방원측에 가담하는 데에 기여하기도 하였다. 그는 이방원측의 핵심으로 활동한 공로로 종3품의 대호군大護軍으로 임명되었으며, 1차 왕자난이 끝나고 1400년(정종 2)의 2차 왕자난이 발생하였을 때 이방원측의 선봉에 서서 회안군 이방간의 측근을 제거하였다. 1․2차 왕자난을 거치면서 마천목은 정안군 이방원의 군사 가운데 주요한 역할을 직접 담당하는 인물로 성장하였다. 태종이 즉위한 이후 마천목은 좌명공신 3등에 올라 회녕군會寧君으로 책봉되었고, 그에 따라 부모도 증직되었으며 토지와 노비 등을 받게 되었다.
태종대에 마천목은 무반으로서 입지를 더욱 굳히게 되는데, 중앙군을 통솔하는 절제사나 총제摠制로서 주로 활동하게 된다. 마천목은 태종으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얻었는데, 마천목이 공무를 처리하다가 사람이 죽게 되어 사헌부에서 처벌하자고 강력히 요구하자, 태종은 곡성으로 잠시 귀양 보냈다가 곧 바로 전라도절제사로 삼았다. 또한 마천목이 천거한 사람이 잘못을 저질러 그에 대한 책임을 사헌부에서 물었을 때도 태종은 거론하지 말라고 하고 있다. 마천목과 태종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태종 12년(1412) 5월 마천목이 전라도 병마도절제사로 임명되었을 때를 들 수 있다. 태종은 마천목을 서울에 두고자 하였으나 노모가 곡성에 있으므로 가까이 가서 관직 생활을 하도록 배려했으며, 옷과 활을 하사하여주고 마천목이 천거한 사람을 병영에서 쓰도록 하였다. 태종과 마천목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마천목은 태종 12년부터 주로 전라도 도절제사로 활동하다가 태종말, 세종 즉위 이후에는 중앙군의 절제사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세종이 즉위한 이후 재차 장흥군長興君으로 책봉되었으며,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오기도 하였다. 세종 6년(1424) 67세의 나이로  어머니를 모시기 위하여 곡성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세종 11년(1429) 마천목은 장흥부원군長興府院君으로 임명되었으며 이후 관직에서 물러나 향촌에 거주하다가, 세종 13년(1431) 2월에 74세의 나이로 죽었다. 세종은 시호를 충정忠靖이라고 내려주었으니, 그의 충성심과 올바른 삶을 의미하는 시호였다. 세종은 이후에도 마천목의 묘를 관리하도록 토지를 내려주기도 하고 증직하기도 하였으니 마천목이 조선의 수성에 많은 공헌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의 묘는 곡성군 석곡면 방주리에 남아 있다.
무인으로 활동하였던 마천목은 각별히 효행과 관련한 몇 가지 일화를 남기고 있다. 마천목이 태종대에 전라도 병마도절제사로 임명되어 온 것도 늙으신 어머니를 가까이서나마 뵙기 위한 뜻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며, 세종 6년에는 결국 어머니를 모시기 위하여 관직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곡성으로 오게 되었다. 마천목이 관직에서 벗어나 어머니를 모시기 위하여 향촌으로 돌아간 일은 이후에 관료 가운데 부모를 모시기 위하여 향촌에 낙향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본보기가 되었으며, 마천목의 예에 의해 그 지역 지방관에 임명하기도 하였다. 마천목은 향촌에서 중앙으로 가 관직 생활을 하면서 늙은 부모를 모시지 못한 관료들에게 새로운 본보기로 제시되었던 것이다.
마천목의 효행이 뛰어났음은 곡성군을 흐르는 섬진강에 남아 있는 도깨비살이라는 마천목과 관련된 유적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마천목이 효성이 지극하여 고기를 잡아 부모를 봉양했는데 더 많은 고기를 잡기 위하여 어살(고기를 잡기 위한 발)을 만들려 주워온 돌이 하필 도깨비가 변한 것이었다 한다. 마천목은 돌을 찾으러 온 도깨비들에게 두계천(섬진강 하류)에 어살을 막아주면 돌을 돌려주겠다고 하여, 도깨비들이 어살을 막았다 한다. 비록 전해지는 설화이지만 마천목의 효행을 잘 보여주는 내용이다. 이 설화는 마천목이 고기를 잡기 위하여 어살을 만들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아울러 하천에 보를 쌓아 물을 대고 농사를 확대하여가던 당시의 농지 확대와도 관련이 있을 수 있다. 아마 마천목이 평소에 효행이 깊었던 사실이 연관되어 이러한 설화로 전해지지 않았나 생각된다.
또 마천목과 관련된 행적으로 강진의 병영성兵營城 수축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강진 병영성은 광산에 있던 병영이 태종 17년(1417) 강진 수인성 아래로 옮겨지면서 축성되었다. 이 때 마천목은 전라도 병마도절제사로 병영 축성의 임무를 맡고 있었다. 병영터를 물색하던 그는 수인산에 올랐다가 잠시 조는 틈에 꿈을 꾸었다 한다. 꿈에 노인이 나타나 활을 쏘아보라 하였는데, 깨어나 화살이 박혔던 꿈속의 그 자리를 찾아가니 화살이 박혀 있고 그 자리가 마땅한 터였다 한다. 그리고 성곽의 둘레를 정하지 못하였는데, 다음날 화살이 박힌 자리를 중심으로 눈이 쌓이지 않은 곳이 있어 그 주위에 성곽을 쌓도록 하였다 한다. 그래서 강진 병영성을 일명 설성雪城이라고 부르기도 한다고 전해지고 있다. 마천목이 병영성을 쌓기 위하여 고심하였던 일화가 전설로 남았을 것이다. 또한 마천목의 할아버지 마치원도 수인성과 관련한 이야기가 남아 있고, 아버지 마영도 왜구와 싸운 이야기가 내려오는 것으로 보아 마천목이 왜구의 방어에 노력하였던 사실이 선대에까지 부연되어졌던 것 같다.
마천목과 관련된 유적으로 곡성군 석곡면에 묘소와 사당 등이 있으며, 공신녹권, 교서 등이 남아 있다. 또한 󰡔마씨문적馬氏文蹟󰡕이 규장각에 남아 있어 마천목의 행적 뿐 만 아니라 자손들의 행적, 그리고 왕으로부터 받은 토지 등에 대한 내용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마천목은 장흥 회녕의 토착 가문의 후예로 태어나 곡성으로 이주하여 살다가 군인으로 발탁되어 활동하였던 인물로 고려말 왜구의 침략이 극성하였을 때 왜구의 방어에 참여하였으며, 조선 건국 이후에는 이방원에게 발탁되어 태종 시대를 열어가는 데 커다란 공헌을 하게 되었다. 그는 전형적인 무인으로 고려말 조선초의 변환기를 살아갔으며, 무인으로서의 임무 수행에 최선을 다하였다. 그는 지방에서 군인으로 진출하여 조선의 개창 이후 왕조를 안정시키는데 기여하였을 뿐 아니라 왜구를 방어하는 데에도 공헌하였으며, 효행이 뛰어나 관료들에게 본보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조선 초기 양반 관료의 전형적인 한 면을 보여주는 인물이다(류창규).

*註:남부대학교에 계시는 류창규 교수가 쓴 글중에서 충정공 관련 글을 "장흥마씨종친회" 카페에 마승렬님이 올린 자료를 펌해서 올립니다. 참고하세요."마씨문적"이 궁금합니다.이와 관련된 자료도 검색을 해서 올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마승렬님! 좋은 자료 감사드립니다.
이름아이콘 산골마을
2008-10-31 21:55
조은자료 많은걸 ,알고 배우고 후손에게
자랑스럽게 알려주 고 가문의영광으로 알게읍니다, 감사합니다,
이런글을 우리종보에많이오려주시면 어떠할지요,
   
이름아이콘 마뿌리
2008-11-02 16:34
ㅎㅎㅎㅎ 점필이 아재! 종보는 벌써 책으로 나와있습니다.좋은 추천 감사드립니다.이번 도선산 시제에 가실꺼죠?11월 5일 새벽 6시 30분에 출발합니다. 꼭 참석하세요.
   
이름아이콘 마상문
2008-12-29 00:15
먼저 마승렬 현종님께 감사의 말씀과 인사를 드림니다 저는 중앙종회 총무이사 (31世) 馬相文임니다 현종님께서  우리 선조님의 훈적과 종문에 사료를 발췌하여 올려주셔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조상의 훈적과 종문에 사적을 발췌하여 올려주셔 잘보왔습니다 종문의 사료는  한사람의 노력으로는 어려우며 관심있는 후손들이 발문하여 교류하면서 종문의 위상을 돈독히하고 자라난 후손들 씨족사 학습에 도움과 자긍심을 심어주는 게기가 될줄압니다  

우리 11世祖 충정공 장흥부원군 께서 축성하신 병영성에 관한 논문을 쓰신 이해수박사님 글을보면 성(城) 이름이설성 (雪城) 류성(柳城) 이와같이 병영성이 유명하니 현재복원 중에 있으나 2000년에 국가사석 379호지정 되였습니다

마승렬님 좋은 사료 잘 보왔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자주 찿아주십시요      (마 상 문)
   
 
  0
3500
    N     분류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33 그렇군요.^^ [3] 유성간 2009-07-27 1939
32 마씨 쌍놈 아닙니다! [1] 유성간 2009-07-25 2068
31 질문 천방지축마골피 [2] 마성용 2009-04-11 2453
30 일반 14세조 휘 정도 선조님 유택 답사기 [4] 小石馬在德 2009-03-13 1676
29 곡성부조묘을 지내면서, [3] 마점필 2009-02-20 1727
28 인사드립니다. [3] 달타냥 2009-02-04 1621
27 새해복많이받으세요, [1] 산골마을 2009-01-23 1404
26 답변 (일부)인터넷상 잘못된 장흥마씨의 유래에 관하여 [5] 마뿌리 2009-01-20 3308
25 긴급 "가입인사" 란이 마련 되었습니다. 가입시 꼭-- [4] 마뿌리 2009-01-16 1836
24 일반 한해를 마무리 하면서 [4] 마뿌리 2008-12-31 1680
23 올한해을 보내면서 [1] 산골마을 2008-12-20 1650
22 안녕하세요^^;; [2] 아기 2008-12-19 1674
21 일반 인사 드림니다 [3] 남포 2008-12-15 1768
20 강진에서의총무이사님 [2] 산골마을 2008-12-05 1692
19 장흥 [2] 산골마을 2008-11-27 1883
18 일반 장흥곡성시제 [5] 산골마을 2008-11-06 1918
12345678